블로그 이미지
책에봐라
이론은 좌경적으로 행동은 우경적으로 살려는 좌파. 현재는 브라질 상파울로에 거주하며 기러기 아빠 생활 2년 째. 총각때는 나를 찾는 여행, 현재는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는 여행 중...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Recent Comment

Archive

Recent Trackback

Statistics Graph

'좋은 책, 밑 줄 쫘악~~~/신영복 교수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 해당되는 글 20

  1. 2010.03.10 참된 도道
  2. 2010.02.27 자본의 포섭
  3. 2010.02.27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4. 2010.02.27 자본주의에서의 인간 관계=상품 관계
  5. 2010.02.27 만남의 부재
  6. 2010.02.27 반구제기
  7. 2010.02.25 오십보 소백보
  8. 2010.02.25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
  9. 2010.02.22 상품미학
  10. 2010.02.08 마을의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마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명의 경우도 도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곤충이란 이름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입니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지요. 사람들이 붙인 표지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언어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도를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이라는 것이지요. 참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로 표현한다면 '도비도道非道 비상도非常道 명비명名非名 비상명非常名'이 되는 것이지요.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 될 뿐이지요. 바로 이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 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위기는 패권 국가들의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 개입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일 뿐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과 간섭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맹자 '이루 상' 中>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인류 5천년 역사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도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비인가화되는 정도에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합니다. 물론 노예제도란 그 자체가 억압적 제도임이 사실이지만, 관계 그 자체가 소멸된 구조는 아니지요. 더구나 그리스-로마의 경우, 일부 광산 노예나 갤리선 노예 등이 담당했던 노동은 오히려 특수한 경우이며, 오늘날의 경찰, 행정, 교육 등을 노예 계급이 담당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내노비는 물론이고 외거노비도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과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게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없는 생산과 얼굴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쓰다가 전화벨 소리 때문에 글씨를 틀려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마저도 돌이켜보면 원인은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IMF 사태는 어떻습니까? 국제 금융자본의 작전과 담합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작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허약한 경제적 구조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식량, 에너지, 기술, 원료, 시장 등 자립적 기반이 없는 취약한 구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3공의 군사정권과 산업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해방 전후의 권력구조와 경제구조의 창출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일제의 식민지 경제구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양혜왕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하게 하고 곡식을 풀어 구휼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웃 나라의 백성들 수가 줄지도 않고 자기 나라의 백성이 늘지도 않는 까닭을 맹자에게 물었지요. 
맹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칼날이 부딪치면 갑옷을 벗어던지고 무기를 끌면서 달아나는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백 보를 달아나 멈춘 자도 있고, 오십 보를 달아나서 멈춘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보 달아난 자가 백 보 달아난 자를 보고 겁쟁이라 비웃는다면 어떻습니가?"
왕이 대답했습니다.
"안 되지요. 백 보는 아니지만 그 역시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지요."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그러한 이치를 아신다면 왕의 백성들이 이웃 나라 백성들 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사철을 놓치지 않으면 곡식은 먹고도 남음이 있으며, 촘촘한 그물로 치어까지 잡아버리지 않는다면 물고기는 먹고도 남을 만큼 많아질것입니다. (봄여름같이) 초목이 자라는 시기에 벌목을 삼가면 목재는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와 목재가 여유 있으면 백성들은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에 아무런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왕도 정치의 시작입니다. 다섯 묘 넓이의 집안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친다면 쉰 살이 넘은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기르게 하여(새끼나 새끼 밴 어미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여) 그 때를 잃지 않게 한다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한 집마다 논밭 백 묘씩 나누어주고 (전쟁등으로)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한 가족 몇 식구가 굶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교육을 엄격히 하고 효도와 공경의 도리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면 (젊은 사람들이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반백이 된 노인들이 물건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천하의 왕이 될 수 없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흔한 해에는 개와 돼지가 사람들의 양식을 먹고 있는데도 나라에서는 이를 거두어 저장할 줄 모르고, 흉년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뒹굴고 있어도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은 내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왕께서 죄를 흉년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모든 백성들은 왕에게로 귀의해 올 것입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요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상품미학은 현대사회의 문화적 본질입니다. 상품미학이란 상품의 표현양식입니다.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도록 디자인된 형식미입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상품미학은 광고 카피처럼 문文, 즉 형식이 승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

형식미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미의 끊임없는 변화에 열중하게 되고 급기야는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 상품 사회의 문화적 상황입니다. 상품의 구매 행위는 소비 이전에 일어납니다. 상품의 브랜드, 디자인, 컬러, 포장 등 외관 즉 형식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광고 카피 역시 소비자가 상품이나 상품의 소비보다 먼저 만나는 약속입니다. 광고는 그 상품에 담겨 있는 사용가치에 대하여 약속합니다. 이 약속은 소비 단계에서 그 허위가 드러납니다. 이 약속이 배반당하는 지점, 즉 그 형식의 허위성이 드러나는 지점이 패션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이 없지 않습니다. 반품과 AS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자에 대한 보상입니다. 광고 카피의 허구성을 뒤집는 것이 못 됩니다. 더구나 사용가치를 먼저 만나게 하는 장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즉 상품 자체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더구나 상품 생산 구조 자체에 대하여 하등의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지요. 반품과 AS 자체가 또 하나의 상품으로 등장하여 허구적인 약속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지요.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子路」
자공이 질문하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주자의 주석에는 마을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에 필시 구합이 있으며, 반대로 마을의 불선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마을의 선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행에 실이 없다 하였습니다.
구합은 정견 없이 남을 추수함이며, 무실은 선자의 편이든 불선자의 편이든 자기의 입장을 갖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견이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없고 그 역도 또한 참이고 보면, 논어의 이 다이얼로그가 우리에게 유별난 의미를 갖는 까닭은, 타협과 기회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파당성에 대한 조명과 지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하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posted by 책에봐라

댓글을 달아 주세요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