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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좌경적으로 행동은 우경적으로 살려는 좌파. 현재는 브라질 상파울로에 거주하며 기러기 아빠 생활 2년 째. 총각때는 나를 찾는 여행, 현재는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는 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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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와 서열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의 미만한 일상적인 폭력이 모두 군대로부터 기인한다.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상습적 구타와 인격 몰수의 습성은 제대 후의 전역병에게 고스란히 체화되어 여성과 어린아이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태도를 구축하고, 학교와 직장에서는 물론 사회관계 전체를 서열화 기계화된다." <장정일의 '공부' 중 22>


한국 우익의 폭력성 중 상당 부분은 자신의 군생활에서 직접 경험한 폭력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 좋은 예로 그들이 비슷한 군복에 우르르 떼지어 다님을 즐기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저들의 폭력성의 근원은 레드콤플렉스에 상당히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군생활에서 배운 일상적 폭력도 한 몫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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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수만큼 제가각의 하느님이 존재하듯이 삼성 사태를 지켜본 사람들의 입장 또한 다양해습니다.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시선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신자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참 해괴한 소리입니다.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부잣집 개가 되기 싫다!"고 소리쳤다고 해서 그런 오명을 붙이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저 민망한 소리는 사적 이익을 위해 참을 버리고 강자 편에 찰싹 달라붙는 일을 지적할 때나 쓰는 말입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전종훈 신부님의 추천 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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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감백 2011.09.17 21:33  Addr Edit/Del Reply

    우리나라처럼 내부고발자를 기죽이는 나라도 없죠


도란 어떤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법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는 윤리적인 강상의 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최대한의 법칙성 즉 우주와 자연의 근본적인 운동 법칙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 의미의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의마하는 참된 의미의 법칙, 즉 불변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못 됨은 물론입니다. 노자의 도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라는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의 사유를 뛰어넘는 것이지요.

명의 경우도 도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붙인 이름이 참된 이름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름이란 원래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란 그 실체를 옳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개미에게 물어보면 '개미'라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더구나 개미라는 이름은, 개미라고 지칭되는 그 곤충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곤충이란 이름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입니다. 비상명非常名일 수밖에 없지요. 사람들이 붙인 표지일 따름이지요. 사람들끼리의 약속, 즉 기호인 셈이지요. 한마디로 언어의 한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도를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박은 참'이라는 것이지요. 참도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라는 그릇은 작은 것이지요.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로 표현한다면 '도비도道非道 비상도非常道 명비명名非名 비상명非常名'이 되는 것이지요.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 될 뿐이지요. 바로 이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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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는 자본 축적의 역사이고 자본 축적은 모순의 누적 과정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 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위기는 패권 국가들의 집단적 담합과 폭력적 개입에 의하여 그것이 억제된 상태일 뿐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물리적 억압과 간섭이 그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의식구조에 있어서 엄청난 허구와 비인간적 논리가 구축됩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물리적 강제를 은폐하고 유화하기 위한 것임은 물론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현대 자본주의는 그 어떤 체제보다도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대중 조작 체계를 장악하고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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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맹자 '이루 상' 中>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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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5천년 역사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도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비인가화되는 정도에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합니다. 물론 노예제도란 그 자체가 억압적 제도임이 사실이지만, 관계 그 자체가 소멸된 구조는 아니지요. 더구나 그리스-로마의 경우, 일부 광산 노예나 갤리선 노예 등이 담당했던 노동은 오히려 특수한 경우이며, 오늘날의 경찰, 행정, 교육 등을 노예 계급이 담당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내노비는 물론이고 외거노비도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과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게 열려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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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없는 생산과 얼굴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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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쓰다가 전화벨 소리 때문에 글씨를 틀려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마저도 돌이켜보면 원인은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IMF 사태는 어떻습니까? 국제 금융자본의 작전과 담합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작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허약한 경제적 구조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식량, 에너지, 기술, 원료, 시장 등 자립적 기반이 없는 취약한 구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3공의 군사정권과 산업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해방 전후의 권력구조와 경제구조의 창출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일제의 식민지 경제구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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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왕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하게 하고 곡식을 풀어 구휼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웃 나라의 백성들 수가 줄지도 않고 자기 나라의 백성이 늘지도 않는 까닭을 맹자에게 물었지요. 
맹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칼날이 부딪치면 갑옷을 벗어던지고 무기를 끌면서 달아나는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백 보를 달아나 멈춘 자도 있고, 오십 보를 달아나서 멈춘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보 달아난 자가 백 보 달아난 자를 보고 겁쟁이라 비웃는다면 어떻습니가?"
왕이 대답했습니다.
"안 되지요. 백 보는 아니지만 그 역시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지요."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그러한 이치를 아신다면 왕의 백성들이 이웃 나라 백성들 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사철을 놓치지 않으면 곡식은 먹고도 남음이 있으며, 촘촘한 그물로 치어까지 잡아버리지 않는다면 물고기는 먹고도 남을 만큼 많아질것입니다. (봄여름같이) 초목이 자라는 시기에 벌목을 삼가면 목재는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와 목재가 여유 있으면 백성들은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에 아무런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왕도 정치의 시작입니다. 다섯 묘 넓이의 집안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친다면 쉰 살이 넘은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기르게 하여(새끼나 새끼 밴 어미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여) 그 때를 잃지 않게 한다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한 집마다 논밭 백 묘씩 나누어주고 (전쟁등으로)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한 가족 몇 식구가 굶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교육을 엄격히 하고 효도와 공경의 도리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면 (젊은 사람들이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반백이 된 노인들이 물건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천하의 왕이 될 수 없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흔한 해에는 개와 돼지가 사람들의 양식을 먹고 있는데도 나라에서는 이를 거두어 저장할 줄 모르고, 흉년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뒹굴고 있어도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은 내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왕께서 죄를 흉년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모든 백성들은 왕에게로 귀의해 올 것입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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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요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知, 호好, 낙樂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언급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신영복 교수의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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