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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좌경적으로 행동은 우경적으로 살려는 좌파. 현재는 브라질 상파울로에 거주하며 기러기 아빠 생활 2년 째. 총각때는 나를 찾는 여행, 현재는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는 여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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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9 12:02 왼편에서 영화보기




캐리 <첫 생리의 공포>

과연 이 영화가 <소년은 울지 않는다>킴벌리 피어스가 만든 영화가 맞단 말인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원작 <캐리>를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킴벌리 본인의 명성에 걸 맞는 연출은 하리라 기대했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이 영화가 남긴 건 줄리안 무어의 훌륭했던 광적인 연기, 그리고 클레이 그레이스 모리츠의 어느덧 성숙해진 미모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평점 4

 

 




인시디어스 1, 2<아날로그가 디지털을 거부할 때>

필자가 보기엔 제임스 완은과대평가된 감독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쏘우>의 반전에 열광할 때도 필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게 왜 반전이지? 시체(?)를 일으켜 세운 후 사실 모든 범죄의 원흉은 그였다, 하는 게, 어떻게 반전이 되는 거지? 이건 그냥 관객에 대한 기만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죠.

인디시어스 1,2편에 대한 평가도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에겐 꽤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필자가 보기엔 기존 하우스 공포 영화에서 많은 부분들을 차용해 왔을 뿐 그저 그런 클리셰들로 가득 찬 영화였을 뿐이었습니다.(샤이닝, 아미타빌 호러, 등등)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완이 영리한 감독이란 건 인정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아날로그적인 영상과 소리만으로도 관객을 공포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만의 재능이기 때문입니다. 인시디어스에서도 이런 그의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평점 6

 


 



열한시 <근대의 지옥에서 시간여행 온 영화>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단 하나의 철학은 신의 예정 조화론’. 신이 이미 정해 놓은 세계에서 인간은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이 낡아빠진 관념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하다니…… (마지막 시퀀스에서 반전을 꾀하기 위해(?), 아니면 해도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막판에 인간의 자유의지론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늦어버린 상황)

 

차리리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스토리텔링이나 컴퓨터 그래픽은 헐리우드 방식이었더라도 담고 있는 철학이 한국적 이였다면? 이렇게까지 흥행에 참패하는 망작이 되진 않았을 겁니다. 예컨대 '매즈 미켈슨'의 더 도어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ㅡ그것도 좋지 않은 것만ㅡ혼합시킨 이런 이야기 방식이 아닌 좀 더 한국적인 이야기로 말이죠. 그럼 영화가 좀 더 입체적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평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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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13:54 왼편에서 영화보기

, 데일, 커트는 고교 동창생이다. 이들은 퇴근 후 모여 술 한잔하면서 직장상사에 대해 뒷담화 까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다.(닉의 상사 데이브(케빈 스페이스)는 부하직원을 개 부리듯 부리는 사이코. 데일의 상사 줄리아(제니퍼 애니스턴)는 기회만 되면 데일에게 달려드는(?) 색광녀. 그나마 한때는 좋은 직장이었으나 사장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마약중독자 아들 바비를 상사로 모시게 되어 죽을 맛인 커트.) 그러던 중 데일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직장상사를 죽이기로 모의한다.

킬러를 고용하여 죽이려고도 해보고 서로가 서로의 직장상사를 바꿔 해보려고도 하나 평범한 샐러리맨들이었던 이들이 살인을 저지르기엔 힘이 부친다. 과연 이들의 직장상사 살해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Horrible Bosses)’는 요 근래 개봉한 R등급 영화 중에서는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주말 개봉 당시 2 8백만 달러, 최종 흥행 성적은 1 1 7백만 달러로 최초 투자액을 훨씬 뛰어넘는 좋은 성적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R등급 코미디 영화치고는 IMDB(Internet Movie Database)에서 7.1(필름 닷컴에서는 B+)이라는 꽤 좋은 평을 받았다.

 

근래 개봉한 허리우드 R등급 코미디 영화들이 모조리 흥행참패를 하는 가운데서도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Horrible Bosses)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직장이라는 코드가 영화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직장이라는 곳은 존재하고 그 곳에서는 언제나 샐러리맨의 비루함을 약점 잡아 괴롭히는 상사들이 있기 마련. 이러한 공감대를 이끌어 낸 것이 이 영화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다.(죽이고 싶은 직장상사라는 소재는 참 좋은 소재인데━그러고 보면 직장상사와의 갈등을 코믹하게 다룬 영화는 그리 흔한 것 같지는 않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의 또 다른 재미는 바로 의외의 반전 캐스팅이다.

남성의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인 제니퍼 애니스턴’(맥 라이언의 빈자리는 확실히 제니퍼의 자리가 된 거 같다)이 섹스에 미친 성희롱 상사 닥터 줄리아 해리스, 어떤 영화에서든 최고의 연기력을 과시하며 진중한 연기를 선보였던 케빈 스페이시는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 직장 상사로, 2005년 영화 레이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며 다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제이미 폭스는 얼치기 사기꾼인 존스.

이들의 평소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반전 캐스팅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색다른 재미이다. 그 중에서도 마약중독자 상사 바비역을 맡은 콜린 파렐의 변신은 파격 중에 파격이 아닐까 한다.

언제나 마약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대머리 바비. 그가 콜린 파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영화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을 정도로 그는 이번 영화에서 과감한 변신을 했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에서도 요즘 허리우드의 뒷북(?) 담론인 월가 자본에 대한 비판이 아주 살짝담겨 있다.

, 데일, 커트가 술집에서 직장 상사들의 뒷담화를 까며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는 씬scene. 한때 월 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던 친구가 마침 이들 앞에 나타난다. 여전히 잘 나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 친구는 멀쑥한 차림으로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면서 구걸을 하고 있는 중이었고, 마침 우연히 만난 세 친구에게 약간의 돈을 구걸한다. 그리고는 구걸의 대가로 화장실에서 핸드잡(?)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는데···(이 친구 남자다 ㅡㅡ) 아무튼 이 친구의 완전히 망가진 모습에 닉, 데일, 커트는 회사를 관두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게 되고, 엉뚱하게도 상사를 죽이겠다는 생각의 전환을 한다.

이 친구의 대사 중 재미있는 게 있다. 세 친구가 너 리먼브라더스에서 잘나가는 직원이었잖아.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됐어라는 질문에 이 친구 리먼 형제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다소 동문서답 같은 이 답변엔 전세계 경제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리먼 브라더스에 대한 미국민의 분노를 짧게나마 영화에 담은 것이리라. 하지만 강렬하게.(이 대사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편집과 설정의 힘이다)

 

영화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를 외양 상으로만 보자면 그냥 웃고 떠들며 시간이나 때우는(killing time) 보통 R등급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과 냉소가 영화 곳곳에 배어 있다.

섹스, 마약, 일에 중독되어 자신의 인생도 오롯이 살지 못하는 직장 상사들.(중독addiction은 자본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그리고 이런 직장 상사들의 부당한 요구에 당당히 맞서지 못한 채 살인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부하직원들. 영화는 이러한 구조적인 (상부)문제와 그 문제에 대응하는 하부의 문제를 통해 미국사회를 통렬히 풍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재미, 웃음, 그리고 나름의 사회 비판적 풍자까지, 꽤 볼만한 영화다. 추천한다.


posted by 책에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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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전부터 눈여겨보고잇던 영화인데 이번 주말엔 이영화 꼭 봐야겠어요 ㅋㅋ 손가락 꼭! 누르고 갑니다

2011.09.12 19:00 왼편에서 영화보기

머리를 질끈 묶은 김기덕이 머리를 풀어 헤친 김기덕에게 질문을 한다
. 머리를 풀어 헤친 김기덕은 머리를 묶은 김기덕의 질문에 가끔은 격하게, 가끔은 어눌하게, 자신의 영화와 인생을 이야기한다. 이때 머리를 묶은 김기덕과 머리를 풀어 헤친 김기덕의 대화를 누군가가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있다. 이 역시 김기덕이다.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다른 영화 속에서? 아니, 중세의 어떤 회화에서 보았다.

김기덕의 아리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장면은 17세기 오스트리아 화가 요하네스 굼프의 <자화상>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굼프는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한 후 이젤 위 화폭에 자신의 모습을 담는다. 이때 거울 속 굼프와 이젤 위 굼프는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지만 실상 실존의 주체인 굼프 자신은 뒷 모습만 보인다. 복제와(거울) 그 복제의 복제(이젤)만 남겨 두고 실체는 사라져 버린 완벽한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굼프의 자화상에서 실현된 것이다.

김기덕의 아리랑으로 돌아가자. 질문하는 김기덕과 대답하는 김기덕,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김기덕. 어떤가? 닮지 않았는가? 굼프가 화폭과 물감이라는 물질로 이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완벽히 구현해 냈다면, 김기덕은 자신의 디지털 카메라 마크II’로 자신만의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구현해 냈다.

그럼 여기서 실존의 주체는 누구인가? 질문하는 김기덕? 대답하는 김기덕? 아니면 그걸 지켜 보다가 후에 그 영상 속 김기덕의 질문에 대답까지 하는 김기덕? 프레임 안에서는 김기덕이라는 감독의 실존적 주체는 없었다.(김기덕 자신이 이야기하듯 프레임 안에 김기덕은 연기에 가까운 연출을 하고 있다) 그 실존적 주체인 김기덕은 프레임 바깥에서 존재하고 있다. 김기덕은 그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카메라를 노려본다. 즉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김기덕이 프레임 밖에서 편집을 하고 있는 김기덕을 노려봄으로써 프레임 밖 김기덕을 증명하는 것이다.(놀랍지 않은가? 실제가 복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복제가 실제를 증명하는 이 방식이)

이것은 어찌 보면 신경생리학에서 말하는 AH(autoscopic hallucination: 자기 몸 안에 있으면서 자기 몸의 바깥에서 자신의 분신을 보는 체험) 현상을 영화적 기법으로 바꾼 것일 수도 있으리라.

 

머리를 풀어 헤친 김기덕은 끊임 없이 떠들어댄다. ‘비몽연출 후 겪었던 트라우마로 인해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었던 이야기,(비몽 촬영 중 배우가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씬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찍던 중 배우가 질식사 할 뻔 했었다고 한다) 주변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한국 영화판에 대한 피끊는 분노에 대한 이야기,(장훈 감독 이야기)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유명해진 악역 연기자들에 대한 비난까지. 정말이지 김기덕 감독은 쉴새 없이 떠들어 대며 가끔은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며, 카메라를 향해 심하게 욕을 퍼 붇기도 한다. 많이 힘들었나 보다. 그런데 어쩌라고? 세계에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한국 감독이란 타이틀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를 피해자로 보이게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적어도 나에게는━그의 하소연(?)이 그리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만의 방식으로(영화 권력?) 일방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아, 피해자라기 보다는 가해자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마지막 시퀀스. 기술공 출신답게 정교하게 한 자루의 총과 여러 발의 총탄을 직접 만든 김기덕 감독. 그는 총을 장전한 후 차를 몰고 어딘가로 향한다. 얼마 후 낯선 동네에서 도착한 그는 총을 점검한 후 한 건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단발마의 총소리가 들려 오고 그는 건물 밖으로 빠져 나온다. 그에게 상처와 아픔을 줬던 자들이 있는 곳이었나 보다. 또 다시 차를 몰고 낯선 동네에 들어선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총을 품고 한 건물에 들어간다. 총소리!. 아무 일 없듯이 태연히 나와 차에 오르는 김기덕 감독.

그의 이런 퍼포먼스는 영화적 기법을 빌려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나는 너희를 죽였다!” “너희들은 내 마음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이 퍼포먼스를 마지막으로 나는 너희를 용서했다!”, 정도?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어쩌라고? 나 같으면 정말 분노하고 화나는 일(감정)이 있으면 이렇게 여유자작하며 영화로(이성) 만들지 못할 거 같은데. 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를 이처럼 냉정하고 침착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분노도 화도 아닌 거 아닌가?

 

김기덕 감독을 좋아하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영화 아리랑이다.

posted by 책에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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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1 19:00 왼편에서 영화보기

 

경고: 스포일러 무진장 많음

 

다국적 의약 회사에 연구원으로 있는 윌(제임스 프랭코)은 알츠하이머 치료약을 연구하고 있다.(윌이 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유인원을 상대로 임상 연구를 하고 있는 윌은 거듭된 실험으로 마침내 유인원의 지능을 향상시키는 실험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신약이 심한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회사는 실험을 전면 중단시키고 실험에 참가했던 유인원들마저 폐기처분 시킨다. 윌은 폐기 처분된 유인원 중 하나가 새끼 시저(앤디 서키스)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회사 몰래 시저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저가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보이자 윌은 자신이 개발한 신약이 시저의 어미를 통해 유전적으로 전달 된(신약의 세례(?)로 이제 유인원들은 대대로 그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스토리 맥락상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실험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확신하며 회사 몰래 연구를 계속해 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남자와 시비가 붙은 윌의 아버지를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사람을 공격한 시저는 결국 유인원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시저는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임을, 그리고 자신과 인간과는 결코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물음들이다. 과연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혹 그 기준에 부합하는 생명체를(마치 영화 속 유인원처럼) 인간과 동등한 관계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인간들에게 종속된(전근대적인 사고 체계) 자연물로만 보아야 하는지 등등, 영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이 던지는 질문은 ━휴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꽤나 진지하고 무거워 보인다.

그러나 꽤나 진지하고 무거운 이 철학적 질문들이 새로울 건 없다. 이미 수 많은 허리우드 영화에서 이와 비슷한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이항적 대립구도에서 발생하는-- 철학적 질문들이 수 차례 던져졌으니까 말이다. 1982년에 제작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런너’,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 그리고 2004년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아이 로봇등등. 정말이지 수 많은 허리우드 영화에서 이와 비슷비슷한 물음들이 있어왔다. 그리고 허리우드가 인간과 테크노(기술)의 이항대립적인 구도에서 발생하는 휴머니즘 ━인간과 비인간에 관한━ 철학을 영화에 담아야 했던 이유가 그 어떤 작가 정신에 근거한 것이 절대 아닌, 철저히 자본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채택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철학이라고도 할 수 없다. 즉,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새로울 것도, 그렇게 철학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 영화계에 불어 닥친 아메리카 뉴 시네마 운동은 마이너 영화들이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 반대로 허리우드의 주류 영화계는 크게 위축되는데 이에 허리우드 자본은 기존의 이데올로기, 예컨대 백인과 비()백인(서부개척 영화), 남성과 여성(가부장적 영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등이 대립구도를 갖는 이데올로기가(개신교적 기독교관) 더 이상 시장 확장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장르를 찾게 된다. 허리우드가 원하는 것은 기존의 개신교적 이데올로기는 그대로 두면서 전세계 영화시장에 진출할 때(사실은 침략에 가깝다) 배타적이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만드는 것인데, 바로 이런 허리우드 욕구에 딱 들어 맞는 장르가 ‘SF’였다. , SF 장르는 백인과 비백인의 대립구조를 인간과 테크노(기술, 외계인)로 은근슬쩍 바꾸었을 뿐, 기존에 미국 우월주의(‘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마디로 허리우드 입맛에 딱 맞는 장르였던 것.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영화가 스타워즈.(······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미국 중서부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허리우드 식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해낸다········우리의 정서들이 허리우드 정서에 따라 규격화되어 간다. 부를 누리는 즐거움과 부를 획득하기 위해 택해야 하는 방법들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허리우드는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현대성의 결정판으로 부상하고 있다. 난 영화가 얼마 안가 만국 공통어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것은 바로 허리우드의(미국의 자본 이데올로기) 언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저서 게으름의 찬양중에서>)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스타워즈 보다는 블레이드 러너의 철학에 더 가깝기는 하다) 그런데 우리 관객들 열광한다. “새롭다” “진지한 영화다”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등등…(평점이 무려 8.6이나 된다. 좀 어이없다)

필자, 단언컨대 혹성탈출은 전혀 새롭지도 않았고, 진지하지도 않았으며, 많은 걸 생각하기에는 너무 뻔했고, 거기다 재미까지 없었던 영화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명 장면이 있긴 있었다. 시저와 그를 따르는 유인원들이 다리를 건너 숲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대결하는 시퀀스는 많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다리는 인간과 비인간의 상징적 경계선이었으며(그 다리가 금문교(?)라는 것 또한 상징적이다. 금문교는 백인들이 원숭이라 부르던 중국인들이 죽음으로 만든 다리이다), 그 경계선에서 인간은 비인간적이었고 유인원은 너무나 인간다웠었던 것 또한 나름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그 동안 TV나 영화로 봤던 혹성탈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친절히(?) 설명해 주는 영화이다. 예컨대 혹성탈출 비긴즈정도? 영화 중반에 TV 뉴스에서 우주 탐사선이 실종됐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그 실종된 탐사선엔 1968년 판 혹성탈출찰턴 헤스턴 2001년 판 혹성탈출마크 윌버그가 타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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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보고갑니다 즐거운하루되세요~!

  2. 영화가 철학을 담기는 힘든 매체죠. 곱씹어봐야되는데 생각하면 장면이 지나가니 ㅋ

    영화는 너무 복잡하게 해놓으면 보기 힘들더라고요. 전 인셉션도 처음에 볼 때는 생각하느라 집중이 안되더라고요. 2번째 볼때야 아! 재밌네라고 느꼈어여 ㅠ.ㅠ

    혹성탈출은 첨 볼때 재밌었습니다. 단순해서 ㅎㅎ

2011.08.12 15:30 왼편에서 영화보기

요약정보: 공포, / 우루과이/ 90분
감독: 구스타보 헤르난데즈 
출연: 플로렌시아 콜루치(로라 역), 아벨 트리팔디(네스터 역), 구스타보 알론소(윌슨 역), 마리아 살라자르(니나 역)


보는 내내 몰랐었다
. 영화가 시작되고 한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때서야 내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뭐지?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라며 기억을 더듬으며 장면을 앞으로 돌리고 천천히 다시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롱테이크였다.”

첫 시퀀스에서 로라(플로렌시아 콜루치)가 아빠 윌슨(구스타보 알론소)과 함께 숲을 헤치고 폐가로 들어가는 장면부터,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필름은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그 끈적한 공포를 온전히 필름에 담고 있었던 것이었다.

 

90분이라는 상영 시간을 롱테이크로 찍기 위해서 얼마나 수없이 사전연습을 했을까. 치밀한 카메라 동선과 배우들의 정확한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들에 공간적 자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집 안에 설치된 완벽한 미장센들. 정말이지 사일런트 하우스의 롱테이크는 그 동안 보았던 롱테이크 영화와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달랐다. 김기덕 감독의 롱테이크 영화 실제상황100조각 짜리 미취학용 직소 퍼즐 정도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사일런트 하우스의 롱테이크는 1000조각 짜리 성인용 직소 퍼즐이라고 할까?)

 

어떤 장면은 이쯤에서는 절대 끊지 않고 갈 수 없을 걸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감독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완벽하게 롱테이크로 소화해 내는 게 아닌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놀라운 연출력을 보인 감독 구스타보 헤르난데즈는 이 영화 사일런트 하우스가 첫 장편 처녀작이란다. 천재에 대한 신화(?)를 믿지 않는 편이지만 이 감독에게는 천재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붙이고 싶다.

 

사일런트 하우스는 영화적 기법이나 스토리 방식 그리고 놀라운 반전까지 골고루 잘 갖춘 영화였다. 허리우드 플롯에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 사일런트 하우스.

 

posted by 책에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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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롱테이크가 그런뜻이었군요.. 어쨌든 굉장하겠는데요 한번에 찍다니 저도 봐야겠습니다.~^^

2011.06.16 07:12 왼편에서 영화보기

 



영화
<한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만큼 실망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톤먼트> <웨이 백>에서 묘한 매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시얼샤 로넌’. 그리고 영화 <엘리자베스>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완벽히 소화해 내어 그 해 모든 영화제 상을 휩쓸며 감독들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 된 케이트 블란쳇’. 거기다 <오만과 편견>으로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되며 단숨에 재능 있는 차세대 감독으로 자리를 잡은 조 라이트감독의 첫 액션 영화 연출이라니. 정말이지 조합만으로도 너무 많은 기대가 되는 영화 <한나> 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장르적 완성도는 둘째 치고, 보고 난 후 처음으로 떠오른 건 이건 본 시리즈의 16세 소녀 판???’


 
<한나>를 보고 난 후 맷 데이먼이 주연한 <본 시리즈 3부작>이 떠 오른 건, 국가권력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정체성을 잃은 주인공이 그 국가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 구조나, 영화적 배경이 되는 장소들을 미국이 아닌 제3국을 선택하여, 미국 국가권력의 거대한 영향력 아래 놓인 주인공의 고립과 투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 등, 본 시리즈가 연상 안 될래야 안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 <한나>본 아이덴티티의 미성년자 버전같았다고나 할까?

 

사실 <본 시리즈>가 액션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니,(모든 액션 영화는 본 시리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한나>도 그 영향 아래에서 어느 정도 모티프를 차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베끼려면 제대로 베낄 것이지. 그저 아쉬울 뿐···

 

각 배우들의 엉성한 액션 연기와(그나마 가장 어린 시얼샤 로넌의 액션 연기가 가장 좋았다) 진부한 액션 연출. 그리고 장면마다 전혀 매치되지 않는 음악으로 인한 산만함. 그 중에 제일 어이없게 만든 것은 마치 이 영화가 시리즈로 제작될 것 같이 표현된 마지막 시퀀스였다.

 

시얼샤 로넌 16세 킬러로 나온다는 것만 빼고는 뭐하나 매력적인걸 찾을 수 없는 영화 <한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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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래도 블루레이가 나오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2. 공감입니당.... 좀 많이실망했던 '이건뭥미'영화...

2011.06.10 11:01 왼편에서 영화보기
어렸을 때 영화를 보면서 슈퍼 히어로를 꿈꿔보지 않은 아이들이 있을까? 슈퍼맨처럼 가고 싶은 곳에 순식간에 날아가고, 배트맨처럼 멋진 배트카도 타보고, 스파이더맨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거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슈퍼맨을 꿈꾸었다. ? 1초에 지구를 7바퀴나(?) 돌고 눈에선 광선, 석탄 하나 들고 손으로 빠르게 비비면 다이아몬드를 만드는데 얘를 아무도 못 이길 것 같아서리!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오직 슈퍼맨만을 꿈꿔오던 필자가 영화 <리미트리스>를 보고 줄을 바꿔 타기로 결심했다. 알약 한 알만 먹으면 머리가 엄청 좋아져서 싸움의 모든 이론을 마스터하지를 않나 좋은 머리로 모든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대처와 대응으로 위기 상황 탈출, 거기다 좋은 머리로 돈까지 잘 버니, 팬티를 겉에 걸친 슈퍼맨보다는 스타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좀더 현실적인 거 같았기 때문.(^^)


에디 모라(브래들리 쿠퍼)는 말 그대로 찌질한 작가다. 아니 작가라고도 할 수 없는 게 책을 쓴다고 다짐만 할 뿐(이 부분에서 필자 심하게 동질감 느꼈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대충 빈둥거리며 사니 작가라기 보다는 백수에 더 가깝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빈둥거리며 살던 에디에게 광명이 찾아온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전처의 말썽꾼 남동생이 내가 다니는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신약인데 한번 드셔보슈. 형님 인생이 달라질거요.”라며 건네준 이상한 알약 하나. 워낙 문제만 일으켰던 전처의 남동생이였기에 혹시나하고 약을 먹지 않지만, 영화의 주인공 에디가 이 약을 먹지 않으면 영화 진행이 안되다 보니 결국은 알약을 꿀꺽 삼키는 에디.(^^)

 

이 알약은 전처 남동생의 말처럼 에디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살아 오면서 배웠거나 혹은 지나치면서 알게 된 온갖 잡다한 지식들이 머리 속에서 선명하게 펼쳐짐은 물론 에디 자신과는 거리가 멀었던 엄청난 집중력까지 생겨난 것.

엄청난 학습능력과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 에디는 세상에 이런 일이 에서나 나올 것 같던 자신의 집을 말끔히 청소한 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책을 쓰기 시작한다.(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환경이 그러하다면...) 그리고는 단 하루 만에 책 한 권을 완필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등,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이제는 찌질한 에디에서 벗어날 것 같던 에디. 그런데 이걸 어째. 알약의 효력은 단 하루였던 거. 에디는 더 많은 알약을 구하기 위해 처남의 집으로 가나 처남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다.처남의 죽음도 뒤로하고 온 집안을 뒤져 꽤 많은 양의 알약을 찾은 에디는 이때부터 누군가의 추적을 받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음모에 빠지게 되는데·······

 

영화 <리미트리스>는 제목이 이야기하듯 최고치’, 뇌 사용의 최고치가 가능하다면의 가정에서 시작한다. 한번쯤 들어봤을 거다. 우리의 뇌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는 그 잠재력에 10프로도 채 쓰지 못한다고. 그러면서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만이 그나마 뇌의 10%정도(?)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예를 든 이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 보니 확인되지도, 확인도 할 수 없는 그저 낭설일 뿐이란다. 어찌되었든 영화 속 에디는 이 알약 덕분에 100프로 이상의 뇌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다.

 


에디가 머리가 좋아지면서 시작한 일들의 순서를 보면 재미있다.

먼저 자신의 염원이던 책을 집필하는 거. 다음으로 자신의 곤궁한 경제력을 해결하기 위해 카지노 돈을 모조리 휩쓸어 버린 후 그 돈을 기반으로 주식 딜러가 되어 엄청난 부를 쌓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치인이 되는 거다.(중간중간에 자신의 몹쓸 몸을 몸짱으로 만들기, 달라진 자신의 외모와 멘탈로 떠났던 옛 여자친구를 되찾기 등등)

 

에디가 주식딜러(컨설턴트)로 부를 쌓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감독의 조소이고, 에디가 그 일을 그만 둔 후 정치에 입문한다는 설정은 온갖 흉악한 자본가가 판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슈퍼히어로는 쫄쫄이를 입은 채 겨우 깡패 몇 명이나 손봐주는 슈퍼맨이(미시적) 아닌, 뛰어난 두뇌와 정의감으로 사회를 일시에 개혁할 수 있는 정치 히어로(거시적)여야 한다는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슈펀맨이나 에디, 둘 다 영웅주의 사관에 근거한다는 것은 필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전혀 새로운 히어로 캐릭터를 보여 준 리미트리스’. (필자가 본문에 '슈퍼 히어로'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해서 이 영화가 단순한 히어로 액션물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정확히 미스터리 스릴러 물이다) 나름 괜찮았던 영화라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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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9 07:05 왼편에서 영화보기

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I Spit on Your Grave: Unrated’> 1978년에 제작된 동명영화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원작이 장르적 완성도로 이미 호평을 받은 지라━ 잘해도 본전이었던 리메이크 작은 그래도 나름 선전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 원작보다 세련되게 연출된 복수 시퀀스들은 쾌와 불쾌의 경계에서 중심을 잘 잡아 한층 완성도를 높였다. (원작을 너무 어렸을 때 보아서 그 불편했던 장면들이 너무 과장되게 내 머리에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도시에 살던 소설가 지망생 제니퍼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느 시골 마을 외딴 산장을 빌려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제니퍼가 혼자 지내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청년 매튜(Jeff Branson)와 친구들은 제니퍼를 성폭행 할 계획을 세우고 산장에 침입한다. 낯선 침입자들에 의해 위험에 처한 제니퍼. 그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지를 발휘해 숲으로 도망을 치나 매튜 일당과 한패인 마을 보안관에게 잡혀 결국 무참히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을 직감한 제니퍼. 또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이런 범죄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음을 직감한 제니퍼는 그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 강물에 뛰어 든다. 떠오르지 않는 그녀. 시체라도 찾기 위해 보안관과 매튜 일당은 강과 숲 속을 이 잡듯이 수색하나,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익사한 채- 강물에 떠내려 갔을 거라 생각한 그들은 평상시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방심한 그 틈을 타고 그녀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언뜻 보기엔 가진 것 없고 무지한 무산계급이(매튜 일당으로 대변되는) 가진 자들에 대한 불만과 질투로 별 이유도 없이 유산계급인 제니퍼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영화 속 이면의━ 이념적 구도는 허리우드의 오랜 전통. 일종의 허리우드 식 레드 콤플렉스라고 할까?(허리우드 영화에서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이나 도시인을 공격하는 시골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좌파를 표현하는데, 이는 미국 반공 이데올로기가 미국 대중을 포섭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추체험을 하게 된다. 예컨대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서 우리의 감정은 원하든 원치 않든 영화 속 제니퍼가 되어 매튜 일당에 대한 공포와 분노, 그리고 복수심을 키우게 되는 거다. 이는 마치 관객들 대부분이 현실에서는 무산계급에 더 가까우면서도 유산계급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뭔가가 뒤집혀 버린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인데, 이런 효과는 저항적인 무산계급에 대한 적개심으로 확대 재생산 된 후,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고착화되어 ━무산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극단적 방어기제로 작동이 된다.

 

허리우드는 왜 이러한 세뇌전술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허리우드야 말로 자본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첨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리우드 영화를 볼 때는 항상 견지적 비판 자세로 관람을 할 필요가 있다. ?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본에 포섭을 당할 수 있으니까.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액면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위와 같다. 그러나 데리다식의 다양한 해석 놀이를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대입시키면 영화는 전혀 다른 식의 영화 읽기가 된다. 유산계급을 대변하던 제니퍼를 늑대들의 소굴로 떨어진 사회적 약자로, 매튜 일당을 지배계급으로, 그리고 보안관을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권력으로 배치시키면, 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사회적 약자들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착취하는 반자본주의 영화 읽기가 된다. 마치 우리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담아 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김복남 살인사건>과 많이 닮았다. 지배계급으로 대변되는 남성의 폭력. 그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 그리고 그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이 잔혹한 복수를 한다는 설정까지…..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복수의 방법인데, 김복남이 낫이라는 생활형 도구에 기대어 감정적인 피의 파토스로 유희한다면 제니퍼는 철저히 기계적인 피의 파토스로 유희한다.(제니퍼는 치밀하게 짜여진 함정들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문 도구들로 자신이 당한 체위(?) 그대로 매튜 일당과 보안관을 살육한다) 그래서 김복남의 복수는 짐승의 그것과 닮았고, 제니퍼의 복수는 세련됐다.(하지만 그녀들에게 죽어가는 그들의 비명 소리는 이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가장 동물적으로 울어 재 낀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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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니퍼를 사회적 약자로 해석한 것에 한표.

  2. 허리우드에서 그런 속셈이 후덜덜하군요. 영화 한편 보기도 무섭네요 쇄뇌당할까봐 ㅋ

2011.01.31 14:25 왼편에서 영화보기


인터폴과 국제 범죄 조직의 추격을 받는 엘리제(안젤리나 졸리). 그녀가 인터폴과 범죄 조직에게 쫓기는 이유는 그녀의 애인 알렉산더가 조직의 돈을 훔쳐 달아났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알렉산더는 영화 후반부까지 모습이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그 정체가 공개된다) 엘리제와의 안전한 조우를 위해 그녀에게 기차에서 자신과 비슷한 외모와 체형의 남자를 하나 골라 인터폴과 범죄 조직의 시선을 따돌리라 지시하고, 이에 엘리제는 이탈리아로 여행 온 미국인 프랭크(조니 뎁)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인터풀이 프랭크를 알렉산더인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엘리제 때문에 범죄자로 몰린 프랭크는 졸지에 인터폴과 범죄 조직에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엘리제를 원망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 프랭크의 엘리제를 향한 사랑은 그녀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사건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륵게 되는 데.......

영화 <투어리스트>의 감독은 2006년 <타인의 삶>을 연출한 독일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각본과 감독을 한 <타인의 삶>으로 2007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상까지 받았었던 영화계의 기대주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가 직접 각본과 감독까지 맡은 영화 <투어리스트>는, '진짜 이 감독이 전작 <타인의 삶>을 감독한 그 감독이 맞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모든 게 엉망인 영화였다. 
장르적 긴장감도 없거니와 영화 중반부터 뻔히 들여다 보이는 반전 및 결말은, 과연 이 영화의 장르를 스릴러 장르에 올려 놓는 것이 맞는 건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으며, 붕 떠있는 스토리 전개와 개연성 부족, 이해할 수 없는 각각의 캐릭터들의 성격 등은, 영화를 더욱 바닥으로 내모는 모양세였다. 


그래도 뭐 하나 건질 것 없는 <투어리스트>에서 그나마 하나 건진거라곤 엘리제 역할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의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약간은 능청스러우면서도 섹시한 조니뎁의 매력이 전부랄까? 
(자自국에선 유망하고 능력있던 감독들이 왜 허리우드만 가면 다 망가지는 걸까? 유망주 감독들의 능력만 쏙 빼먹는 괴물이 허리우드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게 참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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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11:01 왼편에서 영화보기


어렸을 때는 고어물의 피 튀기는 영화를 상당히 좋아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랬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13일의 금요일>이니 <나이트 메어><할로윈> 따위의 영화에 왜 그리 열광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지금은 고어물의 영화를 안 보는 건 아니다. 다만 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그때는 현실의 지루함을 피하기위한 도피로 고어물을 선택했다면 지금은 그 무의미한 살인의 폭력성에 정체를 밝히기 위해 보는거니, 관점이 상당히 진보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진보적 시선의 연장선상에서 영화 <텐더니스>를 선택했었다. 그런데 뒤 통수를 맞고 말았다.  

<텐더니스>는 연쇄 살인마와 그를 쫓는 형사, 그리고 살인마를 추종(?)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이렇게만 이야기 해 놓고 보면 대강 이 영화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나도, 스릴러 물의 진부한 배역들, 살인마·형사·제3의 인물(소녀) 등이 영화의 주요 등장 인물이라는 시놉시스만 보고, 영화도 보기 전에 이미 뻔한 결론을 지어 놓고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뜻 밖의 전개와 사고로 신선하고 잔잔한 충격을 주었다.(아! 경험의 한계여!)

소년 감호소에서 출감하는 '에릭'(존 포스터)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존속살인 외에도 두명의 소녀의 죽음에도 관련이 있다고 믿는  형사 '크리스토 푸오로'(러셀 크로우).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에릭'과 관련된 기사를 스크랩하며 그를 추종하는 소녀 '로렐라이'(소피 트라웁).

식물인간 아내를 둔 크리스토는 에릭이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것을, 아니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를 바라며 오히려 함정을 판다. 은퇴를 앞 둔 그에게 '에릭'은 형사로서의 마지막 업무 이상의 그 어떤 것이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두 어린 소녀의 억울한 죽음도 그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아 보인다. 오직 '에릭'이라는 덜 부화된 괴물을 사회에서 단절시키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 그래서 그에게 '에릭'은 다른 의미의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상사가 자위하는 동안 자신의 가슴을 보여주고 그 댓가로 CD 한장을 받는 로렐라이. 이 어린 소녀에게 희망 따위는 없어 보인다. 그녀의 유일한 목적은 에릭과의 만남...(스포일러라 여기까지) 영화 초반 로렐라이가 왜 에릭의 기사를 스크랩하며 그에게 집착을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비루한 삶의 원인들(엄마와 엄마의 새 남자친구)을 삶에서 지우지 못하는 그녀와는 달리, 부모를 살해하고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 온 에릭이기에 그래서 그녀가 동경하고 추종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들게는 한다.(물론 잘못된 추론이다. 영화 <텐터니스>의 키는 로렐라이가 쥐고 있다). 어쨌든 뒤에 밝혀지는 사실들로 인해 그녀의 유일한 희망도 역시 에릭이다. 

영화 초반 크리스토의 독백 "내 아내가 말하길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행복을 쫓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토와 로렐라이는 고통으로 부터 도망치려는 사람, 고통이 강요하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 둘의 고통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에릭이다.
영화 <텐더니스>에서 유일하게 행복을 쫓는 사람은 연쇄살인마 에릭 뿐이다. 자신의 행복을(성적 욕망) 쫓기 위해 어린 소녀를 죽임은 물론 우연히 자신의 살인을 알게 된 엄마와 아빠까지 죽임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 한 에릭. 그래서 영화 <텐더니스>에서 유일하게 행복을 쫓는 사람은 에릭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의 목적을 에릭으로 상정한 두 명의 '고통자'들로 인해 그마저 끝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니...어쩌면 감독 존 폴슨은 희망 > 고통 > 행복, 이라는 등식을 영화에 세우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영화 <텐더니스>는 누리꾼들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영화다. 연쇄 살인마 영화라 해서 피 튀기고 스릴이 넘칠 것을 기대하고 봤다가, 무겁고 잔잔하게 흐르는 영화에 실망을 했을 것이다. 특히 러셀 크로우가 주연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를 했다가 낭패를 봤을 법 하다. 원래 '기대치'라는 것이 높으면 높을 수록 실망도 큰 법. 하지만 자극적인 기대를 하지 않고 보기에는 <텐더니스>는 꽤 괜찮은 영화였다. 살인이 없는 연쇄 살인마의 영화도 괜찮다면 권하고 싶은 영화 <텐더니스>다. 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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